맛난 와인 마시고 좋은 이야기 하면서..

맛난 와인 마시고 좋은 이야기 하면서..


저녁 7시쯤 지나 시작한 저녁식사를 새벽 4시가 다 되어 넘어서 마무리 했으니 각자 침실로 돌아가며 ‘일단 푹 자자’고 합니다. 그 전에 했던 ‘내일 11시쯤 나가면 좋겠지?’ 같은 말은 잠시 외면하고요. 요즘은 해가 엄청 일찍 뜹니다. 암막 블라인드를 내리고 늦잠에 대한 의지를 불태워봅니다. 그리고 눈을 뜨니 11시… 약속한 시간에 나가긴 글렀지만 다들 꿀잠 잤다는 사실에 흡족해 했습니다. 나가 노는 것도 좋지만 모처럼의 연휴기도 하니까요.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고 아침을 먹고 루방 라 뇌브 Louvain-la-Neuve 로 향했습니다.

차창 밖으로 노란 유채꽃밭이 펼쳐집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므로, 일단 해장 겸 볶음국수를 먹어봅니다. 키오스크에서 베이스가 되는 면이나 밥, 야채, 단백질 (고기 또는 두부). 소스, 토핑을 따로 고르게 되어있습니다. 저는 넓은 쌀면과 오리고기, 베트남 스타일 소스를 골라 맛있게 한 그릇 뚝딱 했습니다.
입가심으로 근처 카페에 앉아 커피도 한 잔 하고 산책을 나섰습니다. 배불리고야 보이는 경치…

루방 라 뇌브는 새 루방이라는 뜻이예요. 비교하자면 서울의 대방동과 신대방동, 이런 관계라고 할 수 있을라나요. 특이한 점이라면 루방은 벨기에 북쪽의 대학도시이고, 대학을 옮겨오고자 조성한 이 계획 도시 새 루방은 벨기에 남쪽에 있다는 점이죠. 루방은 플란더르어를 쓰는 지역에 있어서 이름도 루방의 플란더르어 식인 레우벤 Leuven 으로 더 잘 알려져 있어요.

계획된 교육 신도시 답게 학교와 상권, 나지막한 아파트, 그리고 녹지가 잘 어우러져 있었어요. 네덜란드에서 흔하게 보는 일종의 신도시들은 녹지와 상권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거든요. 루방 라 뇌브는 쇼핑몰까지 알차게 들어서 있어서 활기찬 느낌이 참 좋았습니다.

특이하게도 보이는 빈 아파트들 마다 ‘임대’라고는 붙어있어도 ‘매매’라고는 붙어있지 않았어요. 듣자하니 여기 주거공간은 정부로 부터 최대 100년까지 임대하는 방식이라고 합니다. 주택가격이 폭등하는 일은 있을 수 없겠네요. 누구라도 살고 싶을 신도시를 만들고 누구도 소유할 수 없도록 제도적 장치를 해놓다니. 공적 자원을 투입해 누구라도 같은 조건에 살도록 한 아이디어가 돋보입니다.

한적하고 여유로운 계획도시라… 다음에 또 시간내서 놀러 오고 싶네요.

친구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후식을 미리 샀습니다.


친구가 집 근처에 홍합 맛집이 있다며 데려가 주었습니다. 한 페이지 가득한 홍합메뉴.. 저는 마늘 크림소스를 골랐는데 알도 크고 진한 크림이 정말 맛있었네요.


곁들인 상세르 와인과 집에 가서 나눠먹은 케잌입니다. 이 날은 적당히 먹고 마시고 자정 전에 모두 잠들었어요. 그러고 보니 매우 짧은 하루였네요. 재밌고 알차서 짧은 줄도 몰랐지만요.
벨기에 셋째 날은 어디로 향했을까요?

요즘 좀 바빴습니다. 주중엔 일하고 주말엔 이사갈 곳에 가서 뭔가를 부수거나 청소를 하면서 지내고 있었죠. 그러던 중 벨기에에 살고 있는 오랜 친구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집들이 차 놀러오지 않겠냐고.. 친구가 제안한 주는 마침 긴 연휴였어요. 네덜란드는 목요일이 공휴일에 회사에서 금요일을 징검다리 휴일로 지정해 주말이 나흘이나 되었죠. 새 집에서 하루 일을 하더라도 사흘이나 더 놀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래서 말이 나오기 무섭게 아묻따 가겠다고 일단 대답을 해두었습니다. 당분간 휴가갈 계획도 없었는데 갑자기 어딜 가게 되니 무척 신이 났죠.
기약한 그 날은 금방 다가왔습니다. 간단한 선물을 준비해 길을 나섰습니다. 친구네 까지 직행 열차는 없고, 브뤼셀에서 한 번 갈아타야 되더군요.
로테르담에서 브뤼셀을 가는 기차는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탈리스 Thalys라고 하는 벨기에 고속열차입니다. 암스테르담과 파리를 잇는 노선으로 유명하고 지정좌석에 조금 비싼편입니다. 브뤼셀까지 1시간 30분정도 걸려요. 다른 방법으로는 네덜란드와 벨기에에 흔한 IC 열차인데 대도시 사이를 잇는 급행 정도로 보면 됩니다. 탈리스에 비하면 반값정도 되고 자유석이면서 시간도 자유롭습니다. 브뤼셀에는 2시간이면 도착하고요. 기차역에 걸어가면서 IC 표를 예매하고 다음 기차를 기다립니다. 브뤼셀 가는 IC기차는 매 시간 한 대씩 있습니다.

갈아타는 기차까지 시간이 비는데 뭘 하면 좋을까 생각하다 브뤼셀 역들을 검색했습니다. 브뤼셀엔 기차역이 여러곳이고, 어느 역에서 내리더라도 친구네 가는 기차로 갈아탈 수 있거든요. 북역은 좀 심심하고, 미디역은 유로스타나 탈리스 환승역이라 복잡하죠. 센트럴역에서 내리기로 합니다. 대략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어서 주변을 걸어다녀 보기로 했습니다.




가까운 브뤼셀만 해도 왠지 모를 남국의 정취가 느껴집니다. 프랑스 문화가 깊이 들어와 있기도 하고, 마침 날씨도 거의 여름 날씨고요. 아마 브뤼셀도 징검다리 휴일이었는지 도심 곳곳 테라스마다 사람들로 가득가득 했습니다. 휴양지에 온 기분이 들었어요. 다만 한 가지 미처 생각하지 못 한 것이 있었는데, 브뤼셀은 언덕이 많다는 사실이었어요. 지도만 보고 대략 정해놓은 길이 매우 오르락내리락해서, 햇살 좋은 날 걷고 있으니 땀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나중엔 입고 있던 바람막이와 스웨터마저 벗어버렸죠.
잠깐 휴양 도시의 기분만 느끼고 다음 열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돌아왔습니다. 거기서 우연히 눈에 들어온 것이 역 내부의 장식이었어요. 국가를 위해 헌신한 철도 노동자들을 기리는 추모비가 벽을 채우고 있더군요. 앤트워프역의 거대한 시계장식에 비하면 소박하지만 저는 이렇게 누군가를 기억하는 장소를 좋아합니다.

기차를 타려면 지하 2층 플랫폼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사람들이 지하 1층 계단참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웃고 말았습니다. 네덜란드처럼 언제 바뀔지 모르는 기차 스케줄에 대비해 위에서 기다렸다가 탑승 직전 플랫폼 확정이 나면 내려가려는 것이지요. 믿을 수 없는 열차 스케줄에 사람들도 나름 대처를 하는 모양입니다.


곧 기차가 왔고 이것은 무엇인가… 마치 지난 세기에 만들어진 듯 한 기차입니다. 지저분한 외관 하며, 네덜란드에 비하면 벨기에는 좀 험한 곳이었지, 떠올리곤 올라탔습니다. 그런데 내부는 놀랍도록 깨끗하고 세련되기 까지 해서 이내 기분이 좋아졌어요. 이내 도심을 지나 차창 밖으로 숲과 농가가 펼쳐졌고, 가슴까지 확 트이는 기분이었달까요.

역에 도착해서 마중나온 친구와 함께 집으로 향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것이 지난해 이른 봄 앤트워프에서 였더라고요. 그간 지내온 이야기들을 하며 저녁을 먹었습니다. 물론 돌아보니 여덟시간씩 먹을 필요는 없었긴 하지만 정말 모처럼 여유롭게 이야기 하다보니 시간 가는 줄을 몰랐죠.

친구가 끝없이 내오는 음식 중에 치즈도 있었는데요. 왼쪽부터 프랑스의 꽁떼, 벨기에의 브루허, 비어치즈, 그리고 제가 네덜란드에서 가져간 베임스터와 큐민치즈 입니다. 벨기에는 특이하게도 치즈에 소금을 찍어 먹는다고 하네요. 그냥 소금이 아니고 셀러리 향이 강하게 나는 소금입니다. 매우 독특했죠. 치즈는 주로 그냥 먹고 종종 머스터드나 과일잼을 찍어 먹는 줄로만 알았는데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어요.


친구가 자격증까지 갖춘 와인 전문가인 덕에 모처럼 참 맛있는 와인을 마셨습니다. 10년 가까이 숙성한 보졸레라니 듣기만 해도 신박한데 와인의 색, 향, 맛, 모두 너무나 완벽했죠. 나중에 마신 보르도 보다 전 이 숙성 보졸레의 매력에 빠져버렸어요. 친구 남편이 특별히 구운 초콜렛 케이크 까지 먹고 새벽 세시가 넘어서야 마무리를 했네요. 끝으로 아이스크림을 먹을까 말까 하는 진지한 고민과 함께요.
브뤼셀을 지나는 여정과 친구를 만나 마라톤같은 저녁을 먹은 걸로 간단히 요약되는 하루였지만 참 편하고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