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조 하수구의 테두리가 하얀색이예요. 시공사는 왜 하필 하얀색을 골랐을까 싶다가도, 조금이라도 누렇게 때가 끼면 바로 알아보고 청소할 수 있어서 괜찮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오늘 아침 그게 훌러덩 벗겨졌어요. 테두리가요. 어떻게 하수구 테두리색이 벗겨질 수가 있나, 즉시 A/S감이라며 자세히 들여다 봤죠. 실제 하수구 마개는 광택이 나는 스텐리스 스틸 재질이었고요, 하얀 건 입주 전 긁힘이나 파손을 방지하기 위한 마감테이프였어요.
마감테이프를 완전히 벗겨내니 반짝거리는 하수구가 모습을 드러냈어요. 그러니까 저는 새 집에 들어와 반 년이 넘도록 하수구 주위의 마감테이프를 덮어 둔 채로, 하얀색이 누래질까 깨끗하게 닦아가며 사용해 온거죠. 여태 대체 뭘 한 건가.. 잠시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어요.
그런데 문득, 그 동안 욕조를 깨끗이 사용하기 위해 주의를 기울인 저의 태도와 입장엔 아무런 변화가 없음을 상기했어요. 그게 뭐든 간에, 저는 깨끗하게 쓰고 싶었고, 그에 맞는 노력을 기울여 온거죠.
기대했던 것이 되지 않았을 때, 어떻게 하시나요? 끊임없이 실패를 곱씹나요? 며칠이고 잠을 자거나 술을 마시며 쓴 맛을 달래나요?
최근에 크고 작은 실패를 떠올려봤어요. 당시엔 난감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했는데 지금 또 버젓이 하루를 보내고 있네요. 앞으로 또 뭐든지 실패를 하게 될 텐데, 그 순간을 잘 보낼 방법은 무엇일까요?
저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된 건 아무래도 평정심을 갖게 해주는 것들이었어요. 가장 좋은 예가 매일 하는 것들, 바로 루틴이죠. 어떤 것을 망쳤더라도, 아침에 일어나 늘 하던대로 커피를 마시고, 기지개를 켤 수 있다면. 나가서 산책도 하고, 어제 읽던 책을 다시 집어 이야기를 이어간다면, 지난 실패를 의연히 넘기고 다가올 도전을 또 맞이할 수 있겠죠.
실망하거나 분한 마음에 잠 못 이루고 있다면, 내 하루를 만들어 주는 루틴을 따라보기를. 그 매일 같은 루틴이 붙잡혀버린 생각을 새로운 곳으로 옮겨줄 거예요.
아침에 뉴스를 둘러보다가 한 단어의 뜻을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본 문장 하나가 종일 마음에 남았어요.
찾아본 단어는 zorgen이란 동사예요. 우리말로 하면 돌보다, 보살피다라는 뜻이예요. 그런데 네덜란드어 사전에서 그 단어를 어떻게 설명했는지 보세요.
Doen wat nodig is. 필요한 일을 하다.
간단하면서 명확한 정의죠. 필요한 일, 그러니까 지금 부족하고 불완전한 것을 채우는 일을 하는 것이죠. 돌보고 보살피는 일은 어쩌면 여유가 있을 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요. 사실은 가장 먼저 해야하는 일이구나, 이 정의를 보고 다시금 마음에 새겼습니다. 앞으로 우선순위를 정해야 할 때 다시 떠올려 봐야겠어요.
해외에서 바쁘게 살다 모처럼 한국에 들어오면 당장 필요한데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국내발행 신용카드예요. 오랜 지인이 그랬습니다. “여행갈 때 여권, 비자와 신용카드, 칫솔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이내 정정합니다. “칫솔도 신용카드로 사면 되니까 신용카드만 있으면 되네.”
해외에서 만든 카드는 환전 수수료를 떼가는 경우도 있죠. 그러니 국내에선 국내 카드를 써보자 싶어요. 하지만 언제 만들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 카드는 사용기한도 지난 채 카드지갑에 붙어버렸고, 새로 만들자니 조국땅엔 신용카드가 너무도 많습니다. 이 카드가 내 카드냐, 저 카드가 내 카드냐. 마냥 기웃거리게 되죠.
네가 내 카드가 될 상인가
체크카드를 쓰는 것이 소비를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란 건 알고 있지만요. 소비의 천국인 한국에서 ‘새삥’ 신용카드를 써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다보면 신용카드를 통장 대신 사용하고 있는 저를 발견하죠. 다만 듣자하니 신용카드가 이런저런 혜택을 제공해서 ‘짱좋다’고는 하던데, 왜 내가 카드를 쓰면 남 좋은 일만 하는 기분이 드는지.
무튼 몇년 전 부터 한국에 들어올 때면 신용카드를 하나씩 만들고 있습니다. 면세점 할인 혜택을 준다고 하여 만들어 둔 신세계 카드는 사용 기한이 지나버렸더군요. 또, 오랜 거래처인 SC제일은행에서 발급해준 삼성카드는 그 많다는 혜택을 ‘LINK’ 해놓고 몰라서 못쓰고 있었죠. 이번에 입국해서는, 좀 더 의도적인 카드 발급을 해보리라 다짐하며, 카드고릴라(card-gorilla.com)를 뒤져 롯데카드를 만들었어요.
카드고릴라 대문
카드고를래
카드고릴라는 국내에 발급되고 있는 카드 정보를 비교할 수 있도록 모아놓은 사이트예요. 지금 인기가 많은 카드, 혜택이 풍부한 카드 등을 비교해 볼 수 있죠. 주로 포인트 적립율이 높거나 실적별 캐시백이 가능하거나, 또는 공항 라운지를 이용할 수 있는 카드 등이 인기가 많더라고요. 거주지가 해외이고 종종 한국에 들어오는 경우, 적립이나 캐시백의 최소 이용 기준을 충족하기는 어렵죠. 모처럼 입국해서 이용 금액 기준을 충족 하더라도, 다음 달에야 주는 혜택을 이어받기는 어려워요. 그래서 건당 즉시 할인을 제공하는 카드 중에 할인율이 높은 카드를 고른 것이 롯데카드의 LOCA였던 것이죠.
기존에 갖고 있던 삼성카드도 혜택이 있다고 해서 만든 카드였어요. 카드의 앞 면엔 카드 번호와 함께, 모든 가맹점은 0.5%, 병원, 약국, 카페, 소셜커머스, 편의점 등등은 5% 할인혜택을 준다고 적혀있어요. 그런데 가만 보자… 한국에 들어와 꾸준히 병원을 다니고 있는 올 해, 결제 금액은 매번 0.5%만 할인을 받았거든요. 그럼 카드에 적힌 이것은 도대체 뭔가…
막연히 궁금해 하던 중, 이 삼성카드도 수명이 다 해 새 카드를 받게 되었어요. 그런데 거기에도 병원, 약국 5%라고 똑같이 적혀있는 거예요. 아니 도대체 이 혜택의 정체는 정말 뭐란 말인가? 이번엔 결판을 보겠다는 마음으로 앱을 뒤져보기 시작했고, 내 카드 혜택이라는 메뉴를 찾았어요.
Aㅏ… 할인 한도 3000원…
혜택인지 혜택 아닌지
한도는 월 3000원이었어요. 그것도 전 달에 30만원 정도는 써제껴 줘야 3000원까지 할인을 받을 수 있다는 거죠. 허탈한 웃음이 새어나옵니다. 병원 한 번 가면 2-30만원 결제 기본인데 월 3000원 한도라니. 거꾸로 계산해보니 병원비 60000원 쓰면 그 달 혜택은 다 소진하는 거네요.
이용금액이 한도에 가까워지면 아주 기가 막히게 연락해와 한도를 슬금슬금 높여주는 삼성카드사의 기민함은 그립겠지만, 당분간은 LOCA에서 주는 할인을 받는 게 낫겠어요. 제가 쓰는 롯데카드는 오프 1.2% 온라인 1.5% 즉시 할인 혜택이 있거든요.
이러니 ‘내 참 디러워서’ 모든 소비를 저축에서만 하자, 체크카드를 쓰자는 생각이 들다가도, 1.2%를 이대로 보내드리긴 좀 아까운 마음이 듭니다. 신용 소비를 조장하는 1.2% 혜택은 과연 득인가, 실인가 의문이 들긴 하지만요.
세계적으로 이 병을 완치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로 알려져있죠. 바로 아이패드를 사는 것입니다.
대략의 병세
사실 아이패드를 이미 하나 갖고 있어요. 처음 미니가 출시된 이후로 계속 미니 모델을 사용해왔습니다. 지금 갖고 있는 모델은 미니4로, 이제는 배터리 성능이 많이 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애플펜슬이 호환되지 않죠. 그리고 미니6는 미니인지 프로인지 알 수 없는 가격에 판단을 보류해 왔었…다고는 하지만 만성 아이패드사고싶어병을 달고 지내왔습니다.
노트북의 성능을 위협할 정도로 많은 검색 브라우저를 띄워놓고, 셀 수 없는 당근 알림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완치를 할 수 있었어요.
그렇게 원했다면 왜 진작 애플스토어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 아이패드를 들고 나오지 않았냐, 또는 쿠팡의 할인쵠스를 쓰지 않았냐고 물으실 분들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아이패드 미니 6세대를 애플이 세상을 놀래키며 출시한 지 이미 3년이 되어가는 지금, 이제 사자니 머지않아 ‘토사구패드’ 될 것 같고, 7세대는 만년 ‘내년패드’라 기약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떠올린 것이 당근을 하자. 중고를 사용하다 ‘내년패드’가 ‘오늘패드’가 되는 날, 업그레이드를 할지 계속 쓸지 결정하면 되는 것이었어요.
핸드폰이라면 한국에서 살 생각도 안 했을 겁니다. 시도때도 없이 사진을 찍고 보는 저는 카메라 알림음이 울리는 게 싫거든요. 하지만 아이패드라면…? 사진을 찍을 일은 거의 없습니다.
또 중고가격이 네덜란드에 비해서는 조금 낮게 유지되는 것도 장점입니다. 당근을 해서 살짝 저렴하게 아이패드 미니를 가져보자고 생각을 했습니다.
검색을 얼마나 했으면, 당근이 친절하게 먼저 손을 내밀어 주었어요. 이러지 말고 아이패드 미니6 알림을 받게. 과연 그 후로 관련 제품이 당근에 올라오면 바로바로 소식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적절한 처방
곧 시세를 파악한 저는 한 가지 고민에 빠집니다. 64냐 256이냐. 애플의 지독한 가격정책에 저도 걸려들고 만 것이죠. 256gb의 저장공간은 64gb에 비해 네 배가 크고, 중고 시장에서는 대략 10만원 정도의 추가비용으로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거거익선이라고 256이면 좋겠지만 당근엔 64 모델이 훨씬 많았습니다. 그리고 실제 써보면 64도 충분할 것 같긴 합니다. 그래서 64일 때와 256일 때의 희망 가격을 각각 매겨놓고 때를 기다렸습니다.
색은 상관 없었어요. 아이패드 미니6의 모든 색상이 나름 잘 빠져있기 때문이죠. 셀룰러 기능도 필요 없고, 판매자가 액세서리를 같이 주는지 유무도 크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풀박스 어필하는 분들도 종종 있었는데, 솔직히 박스 어따 씁니까. 신제품 사면 박스가 너무 뽀얘서 버리지 못해 갖고 있는 거죠.
어느 날, 희망 가격보다 살짝 비싼 64모델이 당근에 올라왔어요. 바로 연락을 해서 구매 의향을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거래 전 날 정확한 시간과 위치를 정하기 위해 연락을 했습니다.
“다른 분이 5만원 주고 사가셨네요ㅜㅜ”
누군가 5만원이나 더 주고 사갔는데 이 분은 왜 ㅜㅜ이신지… 그보다 그 사실을 미리 알려줬으면 아 어제 그거 쿨하게 넘기지 않는건데 이 쫘식이 쥔쨔… 뭐 암튼 당근은 넓고 판매자는 많으니까요. Moving on.
저에게 또 기회는 왔습니다. 예술의 전당에서 이희문 님의 무대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어요. 핸드폰은 무음으로 했는지 확인하면서 “아아 2분 남았다~”하는데 무려 256 모델이 제가 딱 원했던 그 가격으로 올라왔습니다. 손가락이 다급하게 움직입니다. ‘안녕하세요! 저한테 파세요!’ 그리고 마음의 반 쯤은 아이패드에 빼앗긴 채로 이희문님의 기가맥힌 공연을 봤습니다.
다시 거래 전 날,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거래 당일 오전에 한 번 더 확인을 했습니다.
이번엔 진짜로 사게 될랑가벼~
판매자님 편하신 곳으로 가서 후딱 물건을 건네받고, 후딱 송금을 해드리고 자리를 떴습니다.
완치, 그리고…
당근에 올라 온 사진으론 잘 몰랐는데 받고보니 모델은 핑크. 판매자님 상남자였네~
판매자님의 사진에는 아이패드와 공책이 나란히 있어서 사이즈 비교용으로 올려둔 줄로만 알았는데, 그 공책이 사실은 아이패드 미니 케이스였더군요. 액세서리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해놓고, 막상 받고보니 짱짱한 케이스라서 잘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치 아날로그 공책같은 외관에 디지털 기기를 품고 있는 대조도 마음에 들어요.
딱 요런 느낌의 아이패드 케이스
필름도 강화유리 재질로 깨끗하게 붙어있어서 그냥 쓰면 되겠다 했는데, 반사가 너무 심해서 지금은 반사가 덜한 필름으로 교체를 했습니다.
그 다음은 펜슬입니다. 맥북이 있는데 아이패드가 필요한 이유, 여기에 있죠. 정품도 좋지만 일단 가격이 단점을 모두 상쇄한다는 짭플펜슬을 직구로 주문했습니다. 그런데 하루이틀 기다리다 보니 당장 쓰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바로 배송이 되는 펜슬을 주문했는데 얘도 해외배송이었네요. 아놔. 지금까지 쓴 돈이면 애플펜슬 정품을 중고로 살 수 있었다는 점은 되도록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무튼 아이패드 미니6의 휴대성은 정말 훌륭하고, 구매하고 일주일이 조금 넘은 시간 동안 책을 네 권 후루룩 읽을 수 있었어요. 다만 저는 가끔은 타이핑도 시워언하게 하고 싶기 때문에, 이제는 휴대용 키보드를 찾아보고 있죠. 이럴 거면 그냥 맥북을 가지고 다니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