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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와 호명 사회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와 호명 사회

    연말 그리고 연초에 읽은 책은 시대예보 시리즈였습니다. 송길영씨는 핵개인의 시대를 통해 기존의 권위가 사라지고, 집단의 이름으로 모여있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상황을 진단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 호명사회를 통해 그 흩어진 개인들이 어떻게 새로운 끈을 찾아 잇는지를 설명하죠.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최근들어 정치 경제적 위기를 경험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어요. 한국은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평생 직업 같은 것을 잃었죠. 각자도생의 결심이 주류가 되면서 태어나면 정해지는 국가보다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도시에 스스로의 정체성을 귀속시키려 하는 것이 그 예이죠.

    또 과학의 발달로 이전처럼 큰 조직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회사라는 크고 복잡한 구조 안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도 이미 상용화된 다양한 기술을 이용해 충분히 일을 할 수 있고, 업무를 단순화 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죠.

    이렇게 단순화 된 일은 지우고 나만이 기여할 수 있는 스킬, 능력을 이용해 일하게 됩니다. 그러자면 쓸데없는 일은 없애고 의미가 있는 일만 연결하는 매니징의 역할이 커지게 되죠. 한번 채용하면 평생 함께하던 옛날과는 달리, 잠시 필요한 스킬에 적합한 사람을 영입해 함께 일하고 헤어지는 것이 요즘은 자연스러워요.

    맞닥뜨리는 과제들이 기존에 있던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이 더 많은 환경에서 경험은 의미가 줄어들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늘어나게 되겠죠. 연장자에 대한 존경이라던가 효도의 무게가 달라지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나이와 경력으로 고하를 정할 것이 아니라, 서로 배울 수 있는 상대로 새로 관계정립을 해야할 것입니다.

    이렇게 흩어지는 개인은, ‘나’의 관심사와 필요한 상대의 능력 등을 위주로 완전히 새로운 구조를 만들게 될 것이예요. 상대가 개인일 수도 있고 조직일 수도 있겠죠. 상대가 어떤 존재이든, ‘나’는 내가 속한 조직보다는 ‘내 이름’을 걸고 나서 상대를 찾게 될 것입니다. 내 소속이 나를 설명해주지 않는 시대거든요.

    세상은 조금씩 변해 조직에 속한 ‘나’도 내 이름을 내세울 수 있는 환경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속한 조직과 상충하는 ‘나’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주변에도 꽤 많은데요. 송길영씨의 설명이 진단이 그런 이들에게 열쇠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번이라도 정체성의 위기를 겪은 사람들은 본인을 독립된 주체로 설명할 필요를 느낍니다.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을 직업적 명칭에만 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본인을 단독자로 서술하고 싶은데 가장 중요한 술어가 ‘회사원이다’라는 현실을 확인하는 순간, 어떻게 이 ‘회사’를 제거할 것인지 고민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입니다. 퇴사해야만 가능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신의 서사를 만들어갈 고유한 무대에 대한 고민에서 ‘나의 이름’으로 살아갈 출발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변화는 밖에서 오지만 안에서 해결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명확하죠. 한편 ‘호명사회’에 진입한 이는 안팎의 요구가 일치하는, 만족도가 굉장히 높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란 생각도 듭니다. 밖으로 나아가기 위해 스스로를 배워가는 모든 분들의 건투를 빕니다. 우리 모두 ‘호명사회’에서 만나길 바라며…

    호명사회는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고 각자 역할을 분업해서 살아왔던 시대를 뒤로하고 당시의 영광으로 포장된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는 이들에게 먼저 찾아옵니다. 반대로 20대, 30대라 하여도 몇 번의 시험 성과로 만들어낸 학벌이나 취업만으로 자신을 설명해야 하는 이들은 곧 자립이라는 과제에 직면하게 될 겁니다. 어떤 계기로 운 좋게 일찍부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고 주변의 지원을 받은 이들도 종종 있습니다만, 자신의 이름으로 바로 서는 일은 누구에게나 시간이 걸리는 일입니다. 지금 조직에 속한 채 조금씩 자신의 이름을 준비하는 이들, 안전한 테두리를 벗어나 타인과 교류하는 발걸음을 내딛는 이들에게 그들만의 호명사회는 조금 더 빨리 다가올 것입니다.

  •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

    2024년 끝무렵에 송길영님의 <핵개인의 시대>를 읽었습니다. 왜 ‘개인’이 아니고 ‘핵개인’일까요? 단순히 한 사람의 의미를 넘어, 분산된 권위는 개개인으로 흩어지고, 세계는 그 개인에 따라 모두 다르게 펼쳐지는 개인 주도적인 사회를 설명하기 위해 ‘핵개인’이라는 단어를 썼다고 이해했습니다.

    온라인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쇼츠를 보면 나라 대 나라의 구도로 무언가를 설명하거나 희화하하는 컨텐츠가 굉장히 많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들은 그저 누구나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웃음거리로 소비되고 말죠. 실제 “새로운 시대의 개인들은 국가가 아니라 자기만의 ‘세계관’을 선택해서 살기를 원”한다고 저자는 설명합니다. 국가가 붕괴될 뻔한 경험으로 인해 국가가 아닌 다른 살길을 찾아나선다는 것이죠.

    개인에게는 꽤 쓸만한 도구가 생겼습니다. AI의 발달로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혼자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어요. 예전에는 많은 시간과 재원을 투자해서 배우고 숙련해야 했던 지식들이 인공지능에 대체되면서, 대체되지 않는 가치, 인간의 고유함이 중요한 개념으로 부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도구를 갖게 된 개인은 이제 큰 회사에만 의지해서 살지 않아도 됩니다. 1인 회사를 적은 자본으로 차리기가 쉬워졌고, 많아진 1인 회사들, 또는 작은 회사들과 많은 개인들이 프로젝트성으로 협업하기가 쉬워진 것이죠. 리더의 의미도 바뀝니다. 거대한 담론이나 아이디어를 갖고 여럿을 이끌기 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포용적인 분위기에서 더 나은 성과를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어요.

    이런 현상은 과거에 가족들이 노인을 공경하고 돌보던 사회에도 파장을 만들어냅니다. 경험은 미래에 의미를 주지 못 하게 되었고, 노인은 효도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작아지고 말았죠. 노인도 하나의 다양성으로 존재하며 공존하는 사회를 구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회 각 분야에서 기존의 권위가 사라지고 모두가 독립적인 개인으로 존재하게 될 때, 우리는 서로 어떻게 기대어 살아가게 될까요? 각자의 관심을 바탕으로 상대를 받아들이며 나만의 목표를 향해 달려갈 준비, 되었나요? 그 동안 세대, 성별, 학교, 종교, 등등 어떤 이름에 기대어 살았다면, 그 모든 것을 털어내고 다시 생각해봐야 할 때입니다. 점점 더 권위는 사라지고 우리는 섬처럼 따로 또 동등하게 서게 될 테니까요.

  •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2024년에 읽은 64번째 책. 갑자기 계 엄한 상황이 되어 책 읽기 드릅게 힘들었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읽기는 했다고 합니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는 올해 노벨 경제학상을 공동 수상한 다론 아제모을루와 제임스 A. 로빈슨의 책입니다. 특히 아제모을루 아재는 석사과정 중에 논문으로 먼저 알게된 학자라 반가운 마음에 책을 읽었습니다.

    저자는 “왜 어느 나라는 잘 살고 어느나라는 가난한가”라는 경제학계의 오랜 질문을 다룹니다. 한 나라의 빈부를 결정하는데 경제제도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경제제도는 정치제도에서 비롯하며 상호작용을 한다는 것을 다양한 역사적 근거를 들어 풀어갑니다.

    한 국가의 포용적 제도는 번영을, 착취적 제도는 빈곤을 불러오지만, 역사적 갈림길에서 한 쪽으로의 필연적 귀결은 없습니다. 번영이냐 빈곤이냐의 결과는 우발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이죠. 서로 충돌하는 힘 중에서 어느 쪽이 살아남는지에 따라서 말입니다.

    이 책을 읽고 있는 중에 계엄 발표와 해제가 있었습니다. 책에서 치켜세운 남한 제도의 우월성은 이제 더 이상 사실이 아니며, 내란 우두머리와 수구잔당의 횡포로 남한은 쇠퇴의 길을 밟을 수도 있는 갈림길에 서게 되었죠.

    한덕수 내란동조자의 버티기 이후 권력이 둘로 나뉘어 충돌하는 양상입니다. 이론서를 아전인수식으로 읽으면 안 되겠으나, 지금은 “어떤 집단이 효율적으로 연합세력을 구성하느냐, 어떤 지도자가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사건을 이끌어 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대목에 기대를 걸고 희망회로를 돌려보는 중입니다. 여의도가 광화문으로, 남태령으로, 전장연으로 번지는 걸 실시간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 역사적 갈림길에서 (feat. 포용의 대잔치였던 남태령)

    역사적 갈림길에서 (feat. 포용의 대잔치였던 남태령)

    또 하루 대단한 날이었습니다. 긴 집회 끝에 피로한 몸을 이끌고 집에서 쉬고 계실까요, 아님 노트북이나 태블릿 화면 속 열기가 여운으로 남아 마음을 가라앉히는 저녁을 보내고 계실까요. 어느 쪽이든 수고 많으셨고 그 모든 연대에 감사한 마음입니다.

    저는 남태령 집회가 지난 밤으로 끝나지 않고 밤새 이어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전농TV 라이브를 비롯해 여러 매체를 모니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더불어민주당의 박찬대 원내대표가 기자간담회를 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래는 모두발언 중 일부인데요.

    많은 국민께서 윤석열 탄핵 이후에도 계속되는 내란 잔당들의 준동을 지켜보시며 불안해하시고 걱정하고 계십니다. 내란 수괴 윤석열이 파면되지 않고 다시 대통령 직무에 복귀했을 경우 국가적 피해와 국민적 피해의 혼란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 자명합니다. 그렇기에 어느 때보다 비상한 각오와 책임감으로 이 사태를 수습하고 확실하게 종결짓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대목을 듣는 순간, 얼마 전 읽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의 한 부분이 생각났습니다. 이 책은 얼마 전 간단하게 소개한 바 있습니다.

    아래는 우리나라의 체제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믿던 때의 글입니다. 남한을 치켜세워주는 이 글과는 달리, 우리는 이미 법질서가 얼마간 침해된 상태로, 경제활동에 막대한 타격을 받으며 3주라는 시간을 보내고 있죠.

    남한에서는 국가가 경제활동을 지원하고 법질서를 유지해준다. 그 덕분에 기업가는 은행과 금융시장에서 돈을 빌릴 수 있고 외국 기업이 남한의 기업과 제휴를 맺을 수 있으며, 개인은 담보대출을 받아 집을 살 수 있다. 남한에서는 대체로 원하면 무슨 사업이든 벌일 수 있다. 북한에서는 어림도 없는 소리지만, 실제로는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불법적으로 은밀히 이런 활동을 하는 주민이 적지 않다. 남한에서는 근로자를 고용하고, 상품과 서비스를 팔며, 어떤 식이든 원하는 대로 시장에서 돈을 쓸 수 있다. 북한에 있는 시장이라고는 암시장뿐이다. 남북한 사람들은 바로 이런 전혀 딴판인 제도하에 살고 있다.

    우리는 이를테면 ‘결정적 분기점’, 또는 역사적 갈림길에 서 있고, 책에서 이런 사건의 결과는 우발적으로 결정이 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결과로 정해진 답은 없다는 겁니다. 더불어민주당에서 말하는 ‘내란 수괴 윤석열이 파면되지 않고 다시 대통령 직무에 복귀했을 경우’도 상당한 확률로 가능한 현실이고, 그 후에 이어질 피해는 복구가 불가능한, 가히 파멸에 가까울 것으로 염려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책에서는 다양한 성공과 폭망의 사례를 들어, 역사적 사건 후 각 나라들이 어떻게 발전 또는 퇴보해 왔는지 설명하고 있는데요. 그 중 아르헨티나 예를 볼까요. 1946년에 후안 도밍고 페론이 민주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를 따르던 의원들이 대법관들을 탄핵하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대법관을 임명함으로써 대법원을 무너뜨립니다. 이는 그 후 군사정권과 민간정권이 번갈아 들어서도 관례로 이어지게 됩니다. 또 이를 이용해 대통령 임기 제한도 없애죠. 그 후는, 우리역사에도 있었던 장기집권이라는 익숙한 전개가 됩니다.

    이 상황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과는 다르지만, 자기 당의 안위만 챙기고 국민을 배반하는 지금 국민의 힘당 소속 의원들의 행태가 아르헨티나의 의원들과 흡사한 부분이 있어보입니다. 과연 민주적 절차에 의해 선출된 권력이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었을까. 이를 책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독립성을 해치려는 시도를 물리칠 의지가 분명한 광범위한 사회계층이 성원을 보낸다면 대법원은 힘을 얻을 수 있다. 미국에서는 그랬지만 아르헨티나의 사정은 달랐다. 자신들의 입지도 언젠가 위협받을 것을 예기치 못한 것은 아니겠지만, 의원들은 거리낌 없이 대법원의 독립성을 훼손했다. 착취적 제도하에서는 대법원을 무너뜨려 얻는 소득이 그만큼 높으므로 잠재적인 이득이 위험을 상쇄하고도 남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반민주주의에 부역해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납치되어 인권을 유린당하고, 국민 대다수가 뜬 눈으로 몇조에 달하는 자산을 잃고 있을 때 자신의 당과 자신만은 득세하는, 이기적인 동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수 많은 의원 부적격자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 비상한 각오와 책임감으로 이 사태를 수습하고 확실하게 종결짓”겠다는 더불어민주당의 의지에 공감합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 지, 더딘 진척상황을 보면 답답하기만 합니다. 정치 진영의 작은 차이를 잠시 잊고 지금 한국 상황을 보면, 자기 당의 안위만 생각하는, 국민의 힘 당이라고 하는 수구세력과 그 나머지 국민이 충돌하고 있죠. 그래서 포용의 대잔치 같았던 오늘의 남태령에 많이 열광하고 조금 안도했습니다. 이 모든 것의 끝에 우리는 과연 어디에 닿게 될까요.

    결정적 분기점에서 기존 제도가 정확히 어떤 발전 경로를 따를지는 서로 충돌하는 힘 중에서 어느 쪽이 살아남느냐, 어떤 집단이 효율적인 연합세력을 구성하느냐, 어떤 지도자가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사건을 이끌어가느냐에 달려 있다.

    효율적인 연합세력을 구성할 때, 이 상황을 우리가 이끌어 갈 수 있다고 이 책이 힌트를 주는 것만 같습니다. 희망을 가져도 될까요.

  • 번영과 빈곤의 갈림길

    번영과 빈곤의 갈림길

    쏟아지는 뉴스에 생각이 잘 정리되지는 않지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제도의 측면에서 한 번 보고 싶었어요. 잘 될 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해보죠.

    비상 계엄이 선포된 날, 저는 마침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라는 책을 읽고 있었어요. 이번 노벨 경제학상을 공동 수상한 대런 애쓰모을루가 쓴 책이죠. 대런 애쓰모을루는 제도 경제학자로 알려져있어요. 제도 경제학은 흔히 알려진 미시 경제의 수요 공급 곡선이나 거시의 이자율 대비 산출 등과는 다르게, 역사 속에서 경제 행동을 결정짓는 제도의 역할을 연구하는 학문이예요. 저도 석사 과정 중에 접하여 매우 관심이 많은 분야입니다.

    그런 질문 하곤 하죠. 왜 어떤 나라는 잘 살고 어떤 나라는 가난한지. 대런 애쓰모을루는 포용적인 제도는 번영을 부르고 착취적인 제도는 빈곤을 부른다고 했어요. 이때 번영과 빈곤은 한 국가의 번영과 빈곤입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모두들 포용적인 제도를 도입하고자 하겠죠?

    하지만 모든 나라가 포용적인 제도를 두고도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리는 이유는, 착취적 제도 하에서 힘을 가진 소수가 이익을 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많은 빵을 골고루 나눠먹으면 풍족하겠지만, 적은 빵을 소수만 나눠먹으면 그 소수도 못잖게 풍족할 거잖아요.

    포용적인 제도가 널리 그리고 깊게 뿌리내리면 빵을 독차지하는 경우도 점점 줄어들고, 남의 권력을 빼앗더라도 거기에서 추가로 얻게 되는 빵이 그다지 크지 않다는 점도 기억해 둡시다. 권력이 분산된다는 소리겠죠. 민주주의 말입니다.

    잠깐 여기서 우리나라를 바라봅니다. 민주화를 이루고 부패를 척결하며 여태껏 한반도에서 보지 못 했던 엄청난 번영을 이루었습니다. 그 길에 경제 위기도 여럿 있었지만 이제는 어지간해서는 무너지지 않을, 그런 힘을 가진 나라가 되었죠. 지난 화요일 밤, 윤석열 내란수괴가 비상 계엄을 외치기 전까지는요.

    이게 무슨 의미일까 잠시 생각해봤어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의 3권 분립제도에 아직도 보완할 부분이 있다는 점이예요. 40여년 전에나 있었던 계엄이 우리 앞에 아무렇지 않게 다시 나타났잖아요. 물론 그 과정에서 거부한 군인도 있었고 신속하게 계엄을 해제한 국회도 있었지만, 아직은 계엄이 나타날 여지가 있었다는 겁니다. 150년 전의 미국도, 200년 전의 프랑스와 영국에도 그럴 여지는 있었어요. 하지만 그 나라들은 지금은 아니예요.

    그 다음이 좀 더 흥미로운데요. 내란수괴를 비롯해 동조자들을 보면 그간 한국의 발전 성과를 조금 더 가져갔으면 가져갔지, 거기서 소외된 사람들은 아니거든요. 빵이 커지면서 점점 더 쪼개져가는 과정에서 악화일로를 느낀 것일까요? 땅 속에서 썩어 문드러진 독재의 망령을 되살려오면 다시 그 옛사람들이 거머쥐었다는 집중된 권력, 그 달달한 맛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계엄이 그들의 ‘정상화’로 가는 길이었을까요?

    앞으로 또 어떻게 될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이쯤해서 다행입니다. 끝끝내 그들이 권력을 잡고 나머지 야당과 국민들이 권력에서 소외되는 순간, 그간 달성한 모든 번영은 쇠퇴의 길을 걸을 테니까요. 안 그래도 이미 무능한 한줌의 여당 머리에서 나오는 그 어떤 아이디어도 오천만 국민이 각자 빛날 때 나오는 것에 비할 수 없을 것이고, 심지어 그들의 아이디어는 발전이라고는 없이 이미 있는 것을 탕진하는 수준에 그칠 것이니까요. 우리의 삶도 그들의 탕진파티에 갈려나가겠죠.

    하루 빨리 윤내란을 탄핵하고, 책임자들을 처벌하길 고대합니다. 빠른 응징이 그 무엇보다 시급합니다. 다음 대통령은 그 다음에 생각해도 돼요. 내각을 구성하지 못 해 벨기에는 거의 2년을 무정부 상태로 지냈습니다. 우리나라 국민은 성숙하고, 성질마저 급하니, 농반 진반으로 벨기에 보다도 훨씬 잘 헤쳐나갈 것으로 봅니다.

    벌써 일주일이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질 않네요. 각자 다른 어려움이 있겠지만 부디 잘 지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