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ryubary

  • 귤말랭이

    귤말랭이

    세상은 넓고 형님들은 많다더니, 또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각종 과일을 말려 먹는다는 것은 알고있었습니다만… 귤말랭이라니.

    온다는 언질도 하나 없이 틱 도착한 택배 하나. 잘 알려진 도서유통사의 박스이나 무게가 가볍습니다. 보내온 곳은 제주. 유추를 가만 해보면 아하… 알려지지 않은 제 팬이 분명합니다.(응?) 가까운 귤 재벌들 덕에 자기도 귤 부자정도는 된다며 친구가 귤말랭이라는 것을 보내왔습니다.

    귤말랭이를 아시나요? 저는 정말 생전 처음 듣는데요. 감이나 무화과 말린 것은 흔히 보아왔죠. 네덜란드 주말 시장에 가면 중동 출신의 사람들이 망고 말린 것, 파인애플, 바나나, 야자대추… 각종 과일을 말려 파는 것을 볼 수 있어요.

    하지만 귤이라니요. 알알이 뜯지 않고 단면을 드러내는 순간 시큼한 즙을 흘려대는 통에 그 많은 물을 말린다는 생각은 단연코 해본 적이 없습니다. 수박을 말린다고 생각해봐요. 대체 뭘 먹는단 말입니까?

    하지만 그런 존재는 있었어요. 게다가 놀라운 것은, 첫입엔 와삭바삭하고, 씹다보면 쫄깃한 젤리를 씹는 것 같으며, 그 중에 퍼지는 달달한 귤 향은 눈을 질끈 감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런 아찔한 존재가 있다니.. 생각하면 정신을 잃어버릴 것만 같습니다.

    혼자 먹으면 입은 춤을 추겠지만 이내 망각의 구석으로 사라질 것이 겁이납니다. 그래서 친구들과 놀러가는 길에 조금 챙겼어요. 미쳤지? 끝내주지? 나만 그런 거 아니지? 빨리 맛있다고 말해, 닥달하고 다음에 만나면 또 꺼내서 이야기 하려고요.

    저는 한동안 귤말랭이의 구름에 떠다닐 것 같습니다.

    아찔한 귤말랭이

  • 고요히 내리는 눈 사진 찍기

    고요히 내리는 눈 사진 찍기

    봄이 오는가 했더니 다시 눈이 내렸죠. 이번이 왠지 마지막일 것 같아 잠깐 DSLR 카메라를 가지고 나가봤어요. 요즘은 핸드폰으로도 훌륭한 사진을 찍을 수 있지만, 그래도 굳이 카메라를 들고 나가보면 ‘역시 카메라다’라는 생각이 들기 마련입니다. 핸드폰이 휴대성 면에서 늘 이기는게 문제라면 문제랄까요.

    모처럼 카메라로 가족 사진도 찍고 이리저리 셔터를 눌러보았는데, 하얀 눈은 소나무의 초록과 잘 어울립니다.

    소복소복 내리는 눈을 잘 찍으면 세상이 정지한 듯, 포근해보이는 근사한 사진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아래 사진처럼 찍힌다면 실망스럽겠죠.

    눈을 눈 답게 찍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위에 두 사진을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겠죠. 답은 셔터스피드입니다. 첫 번째 사진은 셔터가 비교적 짧게 열려있어 눈이 정지한 것 처럼 찍었다면, 두 번째 사진은 셔터가 오래 열려있어 눈이 내려가는 선을 잡아낸 거죠. 두 번째 사진이 꼭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만약 눈보라를 찍으려고 했다면 첫 번째 사진보다 매서운 날씨를 더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어요.

    눈을 눈 답게 찍을 때 중요한 다음 요소로 포커스를 들 수 있어요. 아래 같은 각도의 여러 사진을 비교해 보면, 포커스에 따라 담을 수 있는 눈의 양과 눈송이의 크기가 달라집니다. 포커스를 짧게 잡으면 가까이 있는 눈송이를 꽤 크게 담을 수 있는 대신, 포커스 뒤에 위치한 눈송이는 잘 안 보이게 되죠. 포커스를 뒤로 보낼 수록 더 많은 눈송이를 표현할 수 있어요.

    오늘은 포근한 눈송이를 찍고 싶었기 때문에 셔터 스피드는 1/250s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셔터 스피드에 조절에 따른 빛 손실은 조리개를 조절하거나 후보정으로 손을 봐주는 방법이 있습니다.

    아래는 언젠가 로테르담에 눈이 많이 내리던 날 찍은 사진입니다. 카메라 설정을 어떻게 했을지 상상하며 봐주세요. 🙂

  • 파노라마

    이찬혁의 ‘파노라마’라는 노래 들어보셨나요? 무슨 티비 프로그램 예고편에서 배경음으로 잠깐 나왔는데 노래가 심상치 않았어요. 검색을 해서 전곡을 들었고, 이내 푹 빠지고 말았습니다.

    몽환적인 전자음, 유리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 알아들을 수는 없는 시끄러운 대화가 사라지면서 비트가 시작됩니다. 일단 비트가 아주 맛있습니다. 느긋한 쿵짝, 제가 딱 좋아하는 정도의 비트입니다. 느리게 갈 수도 있지만 사이에 박자를 쪼개 많은 걸 넣을 수도 있을 정도로 여유롭죠.

    가사는 평범하게 ‘잠에서 깨어나’ 어쩌구… 하다가 갑자기 분위기 ‘사망선고’예요. 현실에서 어떤 예상치 못한 사건의 현장으로 순간이동하게 하는 힘은 밴드 눈뜨고 코베인의 노래에서 쉽게 볼 수 있는데요. 이 노래도 그걸 훌륭하게 해냅니다.

    게다가 스스로의 죽음을 노래하는 목소리라기엔 너무 아름답습니다. 시원한 고음이 귀로 시원한 콜라를 한잔 들이키는 느낌이라면 오버…이겠으나 어쩔 수 없습니다. 이찬혁이라는 가수를 잘 몰랐는데 굉장한 미성이네요.

    게다가 처음부터 끝까지 깔려있는 오락같은 전자음, 신디 사운드.. 굉장히 세련되게 느껴져요. 들으면서 떠오른 노래가 토이의 ‘굿바이 썬, 굿바이 문’인데 마침 보컬이 이수현이라는 것도 절묘한 우연이네요.

    이런 이유로 요즘 자주 듣는 노래입니다. 같이 들어요.

    “이렇게 죽을 순 없어
    버켓리스트 다 해봐야 해
    짧은 인생 쥐뿔도 없는게
    스쳐가네 파노라마 처럼”

    이찬혁, 파노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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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은주, 나는 시간을 복원하는 사람입니다

    신은주, 나는 시간을 복원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나’에 둘러싸여 살아갑니다. 내가 가진 편견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결정을 짓죠. 말로는 열린 마음을 강조해도 이내 옹골차게 ‘나’를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물론 너무 자주 주위에 흔들리면 ‘줏대없다’는 표현으로 기를 죽이겠지만, 타인의 시선과 타인의 경험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되는 그 ‘항복의 순간’이 청량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이번에 읽은 책에서 그 시원한 느낌을 받았죠. 연말에 이런 저런 핑계로 친구들과 모였습니다. 그 중 출판계에 종사하는 친구가 요즘 제가 독서로 소일거리를 하는 것을 눈치채고는 책을 몇권 보내주겠노라고 했습니다. 이 책이 그 중에 한 권입니다.

    제목을 보는 순간 웃음이 났습니다.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는 것으로 모자라 복원을 하다니요. 주로 앞을 바라보며 사는 저에겐 날벼락만큼 생소한 분야입니다. 저라면 절대 고르지 않았을 책을 손에 쥐게 되다니, 신선하고 재밌었어요.

    하지만 이내, 너무 지나가버린 시간은 우리의 앞날 만큼이나 미궁이란 사실을 알게되었어요. 갑자기 나타난 유물 한 점, 또는 유물의 부분 한 점, 또는 부서진 유물 더미… 이것은 무엇이었으며 어떤 의미였을까. 저자는 현대 과학을 이용해 지난 시간을 파고드는 사람이었어요.

    보존과학자는 그 어느 것도 지레짐작 해서는 안 되더군요. 단지 앞에 놓인 유물의 쓰임새를 정의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상태도 말이죠. 겉으로 보기에 온전해 번쩍 집어든 유물이 바사삭 가루가 되어버린 에피소드를 읽을 땐 저도 등골에 땀이 맺히는 것 같았어요. 조금의 과격함도 용납하지 않는 대상과 늘 함께하는 일은 얼마나 늘 조심스러울지.

    지금의 기술과 환경으로 복원이 불가능한 유물은 아예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하여 적당한 기술이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는 대목도 인상적이었어요. 되는 대로 어떻게 해보려다 그르치는 것이 아니라, 때를 기다리는 것도 거대한 시간을 가르는 지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지요.

    다음은 비단 유물 복원에 접근하는 방식에서 비롯되었지만 우리의 삶에도 적용할 수 있는 지혜라 책에서 가져왔습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건 알고 있지만 바로잡기에는 너무 늦었거나 어렵다고 생각하는 순간들. 더러는 내 삶을 녹슬게 하는 녹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고 제거하려는 노력을 했지만, 여전히 흔적이 남아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잘못된 것이라도 이를 대하는 나의 태도에 따라 결과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녹이지만 이를 거울삼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나를 보호하는 방패로 삼을지, 나를 갉아먹는지 인식도 하지 못한 채 병들어 갈지,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릴지.

    결국, 시간을 거슬러 가는 것도 3차원의 세계에 사는 우리에게는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 방향이 미래를 향했든, 과거를 향했든 우리는 시간과 함께 나아갈 수 밖에 없고 매번 선택을 해야하죠. 그 선택을 얼마나 의도한 대로 해내는가. 그게 각자 우리 삶의 열쇠인 것 같아요.

  • 마르잔 사트라피, 페르세폴리스

    마르잔 사트라피, 페르세폴리스

    페르세폴리스 하면 이란의 유적을 떠올리는 분들도 있겠습니다만, 오늘 이야기할 주제는 그래픽노블 <페르세폴리스> 입니다. 작가인 마르잔 사트라피는 이란 출신의 프랑스인으로, 이 책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만화는 중간톤도 없이 흑백으로만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선지 읽는 동안 그림을 보면서도 상상의 여지가 많다고 느껴져요.

    이야기는 이란에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면서 시작합니다. 부유하고 자유롭게 살아오던 사트라피의 부모님은 혁명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하고 크게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시위에 나가고 몰래 사진을 찍어오곤 하죠. 히잡 착용 문제로 길에서 싸움이 벌어지더니 나중엔 학교에서 종교에 대한 강요도 합니다. 후에 무리한 전쟁으로 주변 사람들도 다치거나 죽기도 하죠.

    다행히 사트라피 부모님은 부유했던 덕에 가끔 몰래 파티를 열거나 터키에 다녀오면서 불법이 된 기념품을 사오기도 하는데요. 나중에 마르잔을 비엔나로 보내기로 결정하고 부부는 이란에 남습니다. 가정환경 덕에 해외에서의 부당한 간섭이나 차별도 당차게 대처하지만, 성장기에 고독하고 어려운 삶을 보낸 것이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시기가 마침 윤석열의 계엄 발표 후 헌재에서 변론이 오가던 때였기 때문에, 계엄이 성공했더라면 우리도 비슷한 악화일로의 환경에 처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읽었습니다. 물론 탄핵소추가 기각되면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억압받을 뿐더러 당장 생명을 위협받겠죠.

    정부에서 대놓고 탄압을 하기 시작하면, 길거리에서 히잡같은 복장을 이유로 아는 사이에도 언성을 높이고, 그 전에는 누구에게나 주어졌던 자유로운 행동을 누군가 밀고를 하고, 누명을 씌우고, 석연치 않은 이유로 구속을 하는 일이 생기죠. 이란정부는 급기야 이라크와 전쟁을 선포하고 상황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데, 윤석열이 북한을 타격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끔찍합니다.

    전쟁을 묘사한 것 중에 눈길을 끄는 대목은 소년을 징병하며 사후세계를 선전하는 것이었어요. 그게 놀라웠다기 보다는, 그런 선전이 가난한 동네에만 뿌려졌다는 사실이 전쟁의 참혹함을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비엔나로 향한 마르잔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 보호자의 부재, 또래와의 복잡한 관계 등으로 점철된 어려운 10대를 보냅니다. 혁명 때문에 가족과의 단란한 삶을 잃고 혼란의 시간을 보내게 된 마르잔을 보면서, 이란을 떠나서 다행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평온한 이란에서 현명하고 재치있는 할머니 가까이 오래오래 살았을 마르잔을 상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