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ryubary

  • 오늘의 요구: 턱주가리에 힘을 뺄 것

    이게 뼈인가, 싶어 혀로 잡았는데, 확실히 바가지의 형태가 느껴져서 얼른 휴지에 뱉었습니다. 아아, 그것은 저의 오랜 동반자인 크라운이었어요. 장소는 서울역 봉추 찜닭, 늦은 점심 시간이었죠.

    마침 점심 약속이 생겨서 ‘기회는 이때다’ 하고 오늘 가려던 치과를 미뤄버린 하필 그 점심 식사 중에, 오늘 치과를 가야만 하는 사고가 터지다니. 분했습니다. 하지만 곧 침착함을 되찾고 조용히, 치과 예약 버튼을 눌렀죠.

    “전에 권유해주신 크라운 하려고요, 아 그리고요, 오늘 어금니 크라운이 벗겨져 버렸어요.” 그리고, 아마 전에 말씀하신 잇몸치료도… 후.

    의사선생님은 차분하게 새 크라운 자리와 벗겨진 크라운 자리를 갈갈 갈아내셨고, 치위생사님은 입 속 피가 흥건하도록 잇몸 사이를 긁고 또 긁어내셨습니다. 제가 죽은 듯이 조용히 있으니 거듭 괜찮으냐고 물어보셨는데 저는 마취도 했겠다 개운함에 내적 전율을 느끼고 있었거든요. 렘수면까진 아니더라도 그 씨어어언한 기분…

    일주일 후면 새 크라운을 만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때 까지는 일부러 잘 맞지 않게 고안된 임시치아를 피해서 살살 잘 씹어야 한다고 해요. 저는 원래 어금니가 잘 맞아 그 마찰을 최대한 즐기며 꼭꼭 씹어 왔는데요. 게다가 그 꼭꼭 씹는 습관의 결과, 앞으로는 열심히 씹어 먹는 행위 자체를 피해야 한다고 합니다.

    어릴 때는 단단한 것, 질긴 것들을 피하고 살살 씹어야 한다는 말을 들어도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한 쪽 치아가 맞지 않고 기울어버린 다른 쪽에 의존해야 하는 지금은 조금 알 것도 같아요. 다들 이렇게 살살 씹고 살아왔다니 믿을 수가 없을 지경이지만.

    그러고보니 운전에서 손에 힘을 뺐고, 요가에서 몸에 힘을 뺐고, 수영에서 어깨에 힘을 뺐고, 인생에서… 힘을 뺐고, 이젠 턱마저 힘을 빼라는 요구를 받고 있습니다. 삶이 이렇게 힘빼기 퍼레이드였다니 뭐든 힘을 주고 돌격하던 젊은 날은 대체 뭐였을까요.

    참 별 일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오늘 드디어 사건이라고 부를만 한 일이 일어났었네요. 빠진 크라운을 와작 씹지 않은 건 저의 행운이라고 생각할래요.

  • 친구덕

    느긋하게 아침을 맞으며 커피도 마시고 무심코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오랜 친구가 나가서 산책을 돌고 돌아오며 인스타그램에 포스팅을 했더라고요.

    9시가 넘은 시간이었고, 저는 그제야 오늘 하루는 뭘 할까 슬슬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누군가는 벌써 나가서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 SNS 포스팅까지 하다니!

    물론 요즘 짧은 등산이나 산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아침 일찍 해내리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 하고 있다가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느낌까지 들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오전 중에는 나가겠다는 마음을 먹었고, 나갔고, 산림욕장에서 전망대까지 등산같은 산책을 하고, 점심까지 맛나게 먹고 돌아왔네요.

    좋은 영향을 주는 친구님들 사랑합니다.

  • 오래된 음악

    갑자기 예전 담당교수님 생각이 났어요. 그래서 잠깐 검색을 해봤는데, 그 교수님의 SNS계정에 아름다운 풍경 사진 몇 장이 보여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어요. 언젠가 시간이 나면 카메라를 다시 들고 싶다고 했던 대화가 기억나요.

    그런데 의외로 제 눈길을 끈 건 짧은 앨범 소개였어요. 데이브 브루벡 쿼텟의 카네기 라이브 공연을 담은 앨범이었는데, 가까운 누군가가 추천해 주었고 바로 아끼는 앨범이 되었다고 했어요. 케임브리지에서 과학을 공부하는 꿈을 이루기 위해 긴 시간 고군분투하던 시절 들었던 음악이고 벌써 50년을 들어왔다고요.

    그러자 문득 저에게 팻 매쓰니를 소개했던 친구,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알려준 친구들이 생각났어요. 저도 대입 목표를 향해 달려가던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즐겨듣는 음악이거든요. 저도 50년을 듣게 될까요.

    오늘은 오랜 친구, 오랜 음악, 그리고 교수님을 추억하며 At Carnegie Hall 앨범을 들었습니다. 음악은 이렇게나 많은 인연을 이어주는군요.

  • 이메일을 굳이 정리

    새해가 밝습니다. 인박스에 들어있는 메일을 모두 긁어 아카이브 폴더에 담습니다. 인박스가 비었습니다. 다음 해가 밝습니다. 인박스에 들어있는 메일을 모두 긁어 아카이브 폴더에 담습니다. 인박스가 비었습니다. (후략)

    제가 회사 메일을 정리하는 방법입니다. 또는 하지 않는 방법입니다. 이메일을 정리할 시간에 다른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가급적 손을 대지 않아요. 또 회사 방침상 5년이 지난 메일은 자동으로 폐기되므로 굳이 제가 정리할 필요가 없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죠.

    개인 이메일은 어떨까요? 처음에 이메일을 만들었을 땐 나름 상대방 이름이나 프로젝트 이름을 붙인 폴더에 각각 정리하곤 했는데요. 지금은 제가 소통을 하는 이메일 하나, 그리고 광고 및 쇼핑용 메일 하나로 나누어 사용하고, 광고 및 쇼핑용 메일은 각종 광고 메일을 쌓아두고 있어요. 때로 쇼핑할 때는 혹시 받은 쿠폰은 없는지 확인하면 유용할 때도 있고요.

    그런데 늘 마음 속에 조금 걸리는 부분이, 불필요하게 쌓아놓는 이런 디지털 정보를 유지하기 위해 이산화탄소를 낭비하게 된다는 점이예요. 그래서 오늘은 광고 및 쇼핑용 계정을 털어봤어요. 기억에 광고를 자주 내보내는 회사를 골라 검색하고 지워나가는 것이죠. 얼마나 쌓아뒀으면 8천 메일 정도를 지울 수 있었고 또 남아있어요.

    정리하다보니 많은 회사들이 생겼다가 사라지거나, 또는 마케팅 방식을 바꿔가는 점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소소한 재미네요. 예를 들면, 지금은 폐업한 Esprit나 Aquascutum의 지난 광고 메일이 새삼스럽고요. 또 네덜란드에 bol.com 이라는 사이트가 있어요. 쿠팡과 비슷한 곳이고 정기적으로 생필품 세일을 하기 때문에 제가 자주 찾는 곳이예요. 그런데 이 회사가 초창기에는 할인을 받을 수 있는 쿠폰을 엄청 뿌렸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네요. 2.5유로, 5유로, 이런식으로요 고객들에게 돈을 지급한 셈이죠. 지금은 그런 쿠폰은 거의 제공하지 않아요.

    환경도 살리고 나름 지난 날을 되돌아보는 재미도 있어서, 앞으로도 정기적으로 메일 청소를 해보려고 합니다.

  • 헛수고 아님 주의

    욕조 하수구의 테두리가 하얀색이예요. 시공사는 왜 하필 하얀색을 골랐을까 싶다가도, 조금이라도 누렇게 때가 끼면 바로 알아보고 청소할 수 있어서 괜찮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오늘 아침 그게 훌러덩 벗겨졌어요. 테두리가요. 어떻게 하수구 테두리색이 벗겨질 수가 있나, 즉시 A/S감이라며 자세히 들여다 봤죠. 실제 하수구 마개는 광택이 나는 스텐리스 스틸 재질이었고요, 하얀 건 입주 전 긁힘이나 파손을 방지하기 위한 마감테이프였어요.

    마감테이프를 완전히 벗겨내니 반짝거리는 하수구가 모습을 드러냈어요. 그러니까 저는 새 집에 들어와 반 년이 넘도록 하수구 주위의 마감테이프를 덮어 둔 채로, 하얀색이 누래질까 깨끗하게 닦아가며 사용해 온거죠. 여태 대체 뭘 한 건가.. 잠시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어요.

    그런데 문득, 그 동안 욕조를 깨끗이 사용하기 위해 주의를 기울인 저의 태도와 입장엔 아무런 변화가 없음을 상기했어요. 그게 뭐든 간에, 저는 깨끗하게 쓰고 싶었고, 그에 맞는 노력을 기울여 온거죠.

    아무래도 ‘헛수고’는 이런데 붙이는 이름은 아닌 것 같죠.